독서삼품과 / 만적의 난

 

 

▣ 역사 일반상식

 

독서삼품과

 

788년(원성왕 4년)에 설치된 신라시대의 관리등용 방법입니다. 이 제도는 관리선발 뿐 아니라, 국학의 졸업시험과 같은 성격을 가져 신라 하대에 들어서 유명무실해진 국학의 기능을 강화하려는 면이 있었습니다.  시험과목은 하품은 "곡례", "효경"을 읽은자, 중품은 "곡례", "논어", "효경"을 읽는자, 상품은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을 읽어 그 뜻이 잘 통하고 "논어", "효경"에도 밝은 자, 특품은 "오경", "삼사", "제자백가"를 박통한 자로서 순서를 가리지 않고 등용하였습니다. 독서삼품과가 새로운 사회 윤리와 정치사상으로서의 유교를 수학한 학문적 능력에 기준을 두어 선발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라고 한다면 골품제도가 아닌 학문에 기준을 둔 관리가 일부에서나마 탄생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관리층은 6두품이 중심이 되었으나, 당나라에 유학하는 학생수가 증가함에 따라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화백회의

신라의 옛 부족회의에서 유래된 만장일치제 귀족회의로, 진골 이상의 귀족, 중신들이 모여 국왕선거 및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고 결정하였습니다. 회의의 구성운을 "대등"이라고 하고, 이 회의의 의장을 "상대등"이라고 하였으며, 이들은 경주 주위에 있는 네곳의 사영지, 즉 동쪽의 청송산, 서쪽의 피전, 남쪽의 오지산, 북쪽의 금강산에서 회의를 하였습니다.

한 집단 안에서 회의를 할 때 한사람이라도 반대자가 있으면 아무 결정을 볼 수 없는 만장일치제 였으며, 이 제도는 각 집단의 부정을 막고 그 집단의 단결을 강화하였습니다.

 

 

발해사의 의의

고구려가 망한 이후에도 만주지역을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로 유지했으며, 신라와 대립관계에 있었지만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자 고구려 계통의 상류층들은 고려에 흡수되어 민족의 재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후에도 우리의 만주 수복운동은 계속되었는데, 고려 초의 "북진정책", 공민왕의 "요동정벌", 조선초의 "요동수복운동"이 그 예입니다.

 

 

 

 

직지심경(1377)

직지심경은 1372 (공민왕21년) 경한(景閑)이 부처와 조사(祖師)의 게송(偈頌). 법어(法語) 등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엮은 책으로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라 있습니다. 청주 흥덕사에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이쇄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그 실물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재까지 지구상에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입니다.

 

 

 

만적의 난(1198)

 

신종 원년에 최충헌의 사노인 만적 등은 개경 북산에서 공사 노비를 모아놓고 "장상의 원래 씨가 있겠는가? 때만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찌 근육과 뼈를 다하고도 매만 맞고 있겠는가?" 라며 선동하여 반란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들은 갑인일에 흥국사에서 다시 모여 궁중으로 몰려가 난을 일으키고, 환관과 궁노들의 호응을 받아 최충헌을 먼저 죽이고 각자 자기 주인들을 죽이고 천적(賤籍)을 불사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수백 명밖에 모이지 않아 4일 후에 다시 보제사(普濟寺)에 보여 거사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율학박사 '한충유'의 종' 순정'이 주인에게 고발하여 실패하고 만적 등 100여 명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 반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무신집권기에 신분해방을 목표로 일어난 천민반란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기타 천인들의 난으로는 망이.망소이의 난(1176년), 전주 관노의 난, 운도(청도)의 김사미의 난, 초전(울산)의 효심의 난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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